궁시렁2015. 6. 22. 22:13



지난 몇 개월 동안, 가끔 일기를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글을 쓸 일은 없었다. 다만 다른 기회가 있어서 글을 써야만 했는데, '여행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야 했던 적이 있었다. 평소에 어렴풋이 생각해놓았던 글감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라서 기뻤고, 쓰고 난 뒤에도 내 스스로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일본어로 썼던 글을 다시 옮긴 것인데, 내가 썼던 것인데도 한국어로 옮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조금 놀랐다. 그리고 생각보다 길어서 또 놀라기도. ㅎㅎ 아무튼 쿠루리와 관련된 글이기에 여기에도 남겨두려 한다.



* * *


여행을 떠나는 이유


쿠루리의 노래 <하이웨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백 개 정도가 있는데” 그러고 나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 오늘밤 뜬 달이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것 등 여러 이유가 이어진다.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지친 자신을 재충전하고,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낯선 곳을 경험해보고 싶은 것처럼,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짐을 싸서 드디어 여행을 떠나는 날의 두근거림이란! 마치 그날만을 위해 살아오기라도 한 듯이, 마음은 들뜬다.


하지만 열심히 이곳저곳 다니며 여행을 마친 뒤 여러 추억을 돌이켜보아도,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듯한 기분도 든다. 내 경우,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대표적인 예이다.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 없는 꽃, 거리의 이름이 적힌 표지판, 가게의 간판,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책, 버스 정류장의 풍경……. 유명한 건축물이나 관광 명소를 찍기도 했지만, 특별한 것도 없는 풍경 사진이 훨씬 더 많다. 사진이 많은 것뿐 아니라, 그러한 소박한 추억이 더욱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2012년, 친구와 함께 고베를 찾았다. 모토마치 상점가의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식당을 찾지 못한 채 걷다 보니 상점가의 끝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많이 걸어서 녹초가 되고, 친구에게도 미안한 마음에 울적해졌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보니 그날의 기억이 가장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 말고는 거의 아무도 없던 상점가의 어둑한 풍경. 조용한 상점가를 걷고 있던 우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더 놀랐던 것은, 친구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여행이란, 사실은 일상의 연속이 아닐까. 일상적이지 않은 것은 일상과 같은 지평에 있는 것이 아닐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보고 싶어서, 새로운 경험을 맛보고자 여행을 떠나지만, 즐거운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신기한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길을 헤매는 자신이 한심해질 때도 있고, 길에서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보고 미소 지을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면 그전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주변 풍경이 사랑스러워진다. 친근한 풍경이야말로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는 것을 깨닫고, 여행지의 풍경 못지않게 멋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기에.


쿠루리의 노래에 등장하는 ‘나’는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할 거야”라며 큰소리치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게 여행을 떠나는 이유 같은 건 아무것도 없어”라고. 그 말처럼, 여행을 떠나는 데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굉장한 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여행지이든 친근한 장소이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다음번에 여행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이리라. 아무 이유 없이 찾은 여행지에는, 분명 소박한 추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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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ros